침묵으로 여백이 깃들고, ‘그래’ ‘아니’ ‘그리고’와 같은 단어가 반복되며 특별한 리듬이 만들어진다. 무에서 무로, 그것이 살아가는 과정임을, “삶 속의 죽음, 죽음 속의 삶”을 이야기하는 그 음악은 너무 아름답기에 사탄의 방해는 그저 헛되지 않은가. 욘 포세는 단순하고 간결한 언어로 심오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쉼표 너머의 침묵, 그 내밀한 뉘앙스를 채워가는 것은 독자들의 몫이다.
아침 그리고 저녁 도서의 책소개
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의 영예가 욘 포세에게 주어졌다. “입센의 재래” “21세기의 사뮈엘 베케트”라 불리는 노르웨이 작가 욘 포세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널리 활동하는 극작가 중 한 명으로 현대 연극의 최전선을 이끌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희곡 외에도 소설, 시, 에세이, 그림책, 번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방대한 작품을 써왔고 세계 40여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아왔다.그의 작품은 군더더기를 극도로 제한하는 미니멀한 구성, 리얼리즘과 부조리주의 사이에서 표현되는 반복화법, 마침표를 배제하고 리듬감을 강조하는 특유의 시적이고 음악적인 문체를 통해 평범한 일상이나 인간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삶과 죽음이라는 보편적 문제,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예리하고 밀도 있게 그려낸다. 바지런한 산파의 움직임, 산모의 고통어린 숨, 이제 곧 아버지가 되려는 남자의 기대와 걱정. 소설은 노르웨이 해안마을 어딘가, 한 살림집에서의 출산 장면으로 시작된다. 일이 잘못되어 아내나 아이나 아내와 아이 모두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찬 남자의 내적 독백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상념은 분명 그들을 도와 온갖 나쁜 일로부터 구원해줄 신에게로 향한다. 하지만 모든 일이 신의 뜻에 따라 일어난다고는 믿지 않는 남자에게 확실한 것이 있다면, 아이가 할아버지처럼 요한네스라는 이름을 갖게 되리라는 것이다. 미처 단어가 되지 못한 외마디 모음과 뒤섞인 아내의 비명이 길게 이어진 후 마침내 아이가 태어나면서 초조한 시간은 끝난다. 그렇게, 요한네스라는 이름의 아이가 태어났다.
저자 욘 포세 (Jon Fosse) 소개
1959년 9월 29일 노르웨이 헤우게순에서 태어났다. 유년기를 보낸 고향의 인상과 그 시절에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노랫말을 붙이던 추억, 일곱 살 무렵에 경험한 죽음에 이를 만큼 심각한 사고는 훗날 작가의 문학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1975년 베르겐 대학교에서 사회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신문 《귤라 티덴》에서 1983년까지 저널리스트로 활동한다. 1983년 노르웨이의 공식 언어 중 하나인 뉘노르스크로 집필한 소설 『적, 흑(Raudt, Svart)』으로 문단에 데뷔한다. 그 뒤 1987년 다시 대학교로 돌아와서 현대 문학을 전공하고, 졸업한 이후에 호르달란 문예 창작 아카데미에서 1993년까지 강사로 근무한다.1989년 아동 문학 『너무 늦었어(Uendeleg seint)』로 뉘노르스크 청소년 문학상을 수상하고, 소설 『납과 물Bly og vatn)』로 뉘노르스크 문학상을 받는다. 1993년 첫 희곡 『그리고 우리는 영원히 헤어지지 않으리라(Og aldri skal vi skiljast)』를 발표한 뒤 소설 『한 인간의 성장 소설(Prosa fra ein oppvekst)』(1994)로 삼믈라그 문학상, 1995년과 1996년에 펴낸 대표작 『멜랑콜리아 I-II(Melancholia I-II)』로 멜솜 문학상과 순뫼레 문학상을 연이어 수상한다. 이후 희곡 작품에 집중하며 『이름(Namnet)』(1996), 『아이/어머니와 자식/아들(Barnet/Mor og barn/Sonen)』(1997), 『어느 여름날(Ein sommars dag)』, 『죽음의 변주(Dødsvariasjonar)』(2002) 등을 꾸준히 발표한다. ‘헨리크 입센의 재림’, ‘21세기의 사뮈엘 베케트’라는 찬사와 함께, 욘 포세는 입센 문학상, 아스케하우그 문학상, 스웨덴‧노르웨이 문학상, 윌렌달 문학상, 헤다 문학상, 노르웨이 문화 위원회상 그리고 최고의 희곡 작가에게 수여되는 네스트로이상 등을 연이어 수상한다. 2003년 프랑스 국가 공로 기사장을 받고, 영국 《데일리 텔레그래프》에서 선정한 ‘동시대 천재 100인’에 지명된다. 2014년 유럽 문학상을 수상하고, 2019년부터 2022년까지 집필에 매진한 끝에 대작 『7부작(Septologien)』을 완성해 낸다. 2022년, 이 작품으로 부커상 국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고, 베를린 예술 아카데미의 명예 회원으로 추대된다.욘 포세는 지금까지 소설과 희곡, 시와 에세이, 아동 문학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영역에서 활약하며 약 70여 편의 작품을 발표했으며, 전 세계 50여 개국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특히 그의 희곡은 ‘현대극 중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 평가받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상연되고 있다. 2023년 소설 『백색(Kvitleik)』과 희곡 『검은 숲속(I svarte skogen inne)』을 출간한 작가는 현재 오스트리아 하인부르크안데어도나우와 노르웨이 베르겐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다. 2023년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목소리를 부여한 혁신적인 희곡과 산문”을 인정받으며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발췌문
나는 오랫동안 이런 이야기를 꿈꾸어왔다. 심각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아도, 위대한 인간이 등장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아름답고 눈부신 이야기를. 누구나 경험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넘어갈 수 없는 두 가지 주제, 바로 삶과 죽음을 ‘특별한 언어’로 이야기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이 작가는 이 어려운 작업을 아주 능청맞고도 사랑스럽게 해낸다. 삶과 죽음 사이에 들어찬 모든 문장에 좀처럼 마침표를 찍지 않음으로써. 문장과 문장 사이에, 잠시 휴식하기 위한 쉼표만을 사용하면서, 죽음과 삶의 과정이 결국 하나의 끝나지 않는 문장 속으로 들어오도록. 이 이야기 속에서 삶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은 삶을 밀어내지 않는다. 오직 하나의 무지갯빛 색실로 거대한 모자이크를 완성하는 것처럼, 작가는 ‘삶 속의 죽음, 죽음 속의 삶’이라는 아름다운 벽화를 천의무봉의 손길로 직조해낸다. 이 이야기와 함께하는 순간, ‘이토록 가까운 삶’과 ‘저토록 머나먼 죽음’이 서로의 손을 붙잡고 세상에서 가장 우아하고 아름다운 왈츠를 추고 있는 듯하다. - 정여울 (작가, 『문학이 필요한 시간』 저자, KBS 「정여울의 도서관」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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